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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마술은 환상의 예술… 즐거움과 감동 줘야”
By : 관리자

[주목, 이사람] ‘마술의 여신’ 오은영



세 가지를 고르라기에 카드는 다이아몬드 7을 뽑고, 주사위는 6을, 칩은 500짜리를 몰래 선택했다. 그가 주문을 외우듯 “운명대로 고르게 될 것”이라며 미리 건네주었던 봉투를 열어보니 놀랍게도 방금 고른 세 가지를 한데 모아 찍어놓은 한 장의 사진이 나왔다. 이것저것 바꾸다 택했던 잔머리의 범행현장을 훤히 들킨 것만 같았다. 손등 위 100원짜리 동전이 순식간에 10원짜리로 바뀌었다. 눈을 크게 뜬 채 지켜보고 있었는데도. 그림 속 모나리자는 내가 고른 카드가 무엇인지를 척척 맞혀낸다.


홀린다는 게 이런 기분일 듯하다. 종종 TV 예능프로의 마술을 볼 때만해도 적당히 모르는 척 해주는 건 줄 알았다. 이렇게 꼼짝없이 당할 줄은 몰랐다. 마술의 장점은 속아 넘어가도 유쾌하고 재미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한 것인지 몹시 궁금했지만 꾹 참았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여전히 ‘잘나가는’ 마술사이므로 비밀 캐묻기는 묻어두기로 했다. 미녀 마술사 오은영을 말하는 거다. 인터뷰를 끝내고 카페에 들러 나란히 레몬에이드를 마실 때 그가 선사해준 깜짝 마술이었다.



마술쇼에서 대개 여성 역할은 섹시한 차림의 조수라든지, 남성 마술사의 도움을 바라는 연기자로 한정된다. 오은영은 이러한 틀을 깨뜨리고 당당히 남자 마술사들과 경쟁하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여자 마술사다. 그는 자신 이름을 내건 쇼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오며 ‘매직 여신’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한국외국어대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당시 인기 업종이던 항공사 승무원이 되었지만 취미로 시작한 마술에 빠져 직장을 그만두고 마술사가 되었다.


“비번이던 날 선배가 간단한 손마술을 보여줬어요. 성냥갑이 손바닥 위에서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더니 덤블링까지 하더라구요. 하하. 그때 확신이 섰어요. 매뉴얼대로 일해야 하는 승무원보다 마술은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이니 더욱 잘할 수 있을거라는…충만된 자신감이 느껴졌어요. 결심하자마자 홍콩에 거주하는 중국 마술가문의 딸 수이차오 등 해외 마술사들을 찾아다니며 배웠죠.”


여자 마술사가 드문 시절 혹독한 연습 끝에 그는 2003년 홍콩세계마술대회에서 최고상을 거머쥐었고 이듬해 같은 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가 한복을 차려입고 펼치는 국내 최초의 창작전통마술 ‘황진이의 4계’는 제2회 부산국제매직페스티벌 폐막식 작품으로 무대를 달궜다.


“창조적인 일인 만큼 새로운 연출이 중요해요. 기존 소재라도 내 스토리에 맞도록 새로 짜고 연습해야 합니다. 작품마다 다르지만 소품까지 직접 만들어 공연하다 보면 몇 년씩 걸리기도 하구요.”


국내엔 아직도 여자 마술사가 드물다.


“쇼 비지니스답게 방대한 양을 준비하고 연출해야 해요. 대개 마술사 혼자서 다 책임져야 하는데, 사실 여자의 지위가 향상된 지 얼마 안 된 데다 전방위적으로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은 탓에 역부족이어서 적은 것 같아요.”


그렇다고 남자 마술사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후배 양성을 위해 강형동 교수, 최훈 마술사와 함께 동아인재대학에 마술학과를 만들기도 했다.



국내 최초의 마술 인문서 ‘호모매지쿠스 마술적 인간의 역사’를 펴낸 ‘마술 여신’ 오은영.
그는 “마술은 단순한 오락이나 유희의 대상이 아니라, 믿고 싶어하는 것을 보는 인간의 욕망과 감각,
끊임없는 지식의 창조와 권력에 대한 희구가 얽혀 있는 역동적인 세계”라고 말한다.
김범준 기자


“마술사는 단순하게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즐기는 구성원이 되어야 합니다. 관객들이 어떤 마술을 놀라워하는지, 쇼를 통해 어떠한 시간을 추구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은 마술사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함이 아니예요. 마술사는 서로 공감하면서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여가를 즐겁게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다분히 공동체적 실천자라고 자부합니다. 마술과 예술은 현실에 뿌리를 두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간다는 점에서 닮았어요.”


부지런함은 못 감춘다. 2주 전 그는 마술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새 책을 펴냈다. ‘호모매지쿠스 마술적 인간의 역사-그림 속으로 들어간 마술사들’(북산)이다. 역사가가 아닌 마술사 관점에서 시대 특징들을 짚어 나가며 마술이 인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밀착되어 왔는지를 서술했다. 명화와 여러 문헌 속 그림을 통해 당대의 사회와 문화, 가치관을 짚어 내기도 하고, 역사의 불편한 진실을 꼬집으며 마술의 흐름과 변화과정을 보여준다. 현대 영화의 모태가 된 유령마술 판타스마고리아, 모자에서 토끼가 나오는 마술의 기원이 된 매리 토프트의 토끼 출산소동,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살았던 영국인 마술사 청링수 등 매혹적이고 신비한 역사를 담은 국내 최초의 마술 인문서다.


“마술사의 손은 그 어떤 관객의 눈보다 빨라야만 한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의 책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마술사의 손을 들여다보며 진실과 착각을 구분 지으려는 사람은 정작 그 마술이 보여주고자 하는 행복과 즐거움의 진실을 밝혀내지 못한다. 마술 속에 담긴 환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눈에 비친 세상을 더 넓고 깊은 혜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